철학하나

[철학하나] 하이데거의 걱정Angst과 염려Sorge 구분

설왕은 2021. 5. 3. 23:03

실존주의가 이해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 방식은 불안으로 대표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세상에-있는-존재(Being-in-the-world)로서 인간의 기본적인 존재 방식을 걱정(Angst)이라고 단언합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걱정은 두려움과 구별되는 말로 두려움은 두려움의 대상이 존재하는 반면에 걱정은 그 대상이 뚜렷하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귀신을 두려워할 있습니다. 하지만 귀신을 걱정하지는 않죠. 하지만 우리나라 말로 걱정은  대상을 갖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시험을 걱정하거나 연로하신 부모님을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 사용에서 걱정의 대상이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가 쓰는 말은 원어 그대로 외워둘 필요가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여기서 걱정이라고 번역되는 Angst 대상이 존재하는 않는 단어입니다. 굳이 이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두려움보다는 걱정이 어울리기 때문에 걱정이라고 번역을 것이고요. 막연한 걱정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걱정은 막연한 걱정이기는 한데 사소하고 쓸데없는 걱정은 아닙니다. 하이데거의 걱정은 대상이 없는데 강도는 매우 센 감정입니다. 존재의 의미가 흔들리는 순간에, 즉 인간 실존의 위기에 직면해 발생하는 혼돈의 순간에 발생하는 감정을 의미합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인간의 존재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는데요. 여기서 이런 유명한 문장이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의 존재 자체가 늘 문제가 되는 존재다. 갑자기 문득 그런 생각 혹은 감정이 드는 것이죠. “나는 누구고 여기는 어디지?”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 실존을 표현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걱정 대신 염려(Sorge)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걱정과 염려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걱정보다는 염려가 인간 존재 방식을 설명하는 적합하다고 여긴 것지요. 비슷한 단어인데요.

 

차이가 있습니다. 걱정은요. 떨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걱정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걱정 없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죠. 우리는 걱정 없는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하지만 염려는 떨쳐버릴 없는 감정입니다. 하이데거는 염려 없는 사람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염려는 걱정과 비슷한 단어인데요. 아마 이런 단어들을 어떻게 한국말로 번역해야 할지 철학자들이 고민이 많았을 같습니다. 念慮 걱정이기는 한데 한자를 살펴보면 생각할 염에 생각할 려입니다. 그러니까 마디로 생각이 많은 것인데요. 이것이 바로 걱정이죠.

 

 

그러나 염려의 한자를 고려해보면 염려와 걱정은 느낌이 다릅니다. 걱정은 떨쳐버릴 수도 있지만 염려는 떨쳐버릴 없다는 것이 번째 차이고요. 번째 차이는 걱정은 매우 부정적인 단어이지만 염려는 그렇지만은 않은 단어입니다. 걱정은 인간이 떨쳐버려야 할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관심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염려(Sorge)는 인간의 존재 방식에 따른 인간의 근원적인 속성으로 부정적인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Dasein)은 “존재가능에 대한 존재로서 항상 자기 자신을 넘어서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염려는 인간의 필연적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가 있는 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염려는 필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과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인간의 근원적 속성을 염려라고 표현했습니다.

 

하이데거는 고대 로마의 히기누스의 우화를 인용해서 인간의 존재 방식이 염려라는 것을 재밌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 우화에서는 보면 염려라는 신이 나오는데요. 염려라는 여신이 강을 건너갈 때 점토를 발견했습니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염려는 그 점토를 한 덩어리 떼어내서 무엇인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만들어낸 것을 보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는데요. 그때 주피터 신이 다가왔습니다. 염려는 자신이 만든 점토 작품에 혼을 넣어 달라고 주피터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주피터는 그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염려가 그 점토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려고 하자 주피터는 자기가 혼을 넣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둘이 싸우고 있는데 텔루스, 대지가 나서서 그 형상에 자기의 몸 일부가 사용되었으니 자신의 이름이 붙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셋이 다투다가 사투르누스, 즉 시간을 재판관으로 불러왔습니다. 그러자 시간이 이렇게 판결을 내립니다.

 

“주피터는 혼을 주었으니 그가 죽을 때 혼을 받고, 텔루스는 육체를 선물했으니 그가 죽을 때 육체를 받아라. 하지만 염려가 이 존재를 처음 만들었으니 이 존재가 살아가는 동안에는 이 존재는 염려의 것이니라. 그러나 이 존재는 후무스, 즉 흙으로 만들어졌으니 호모(인간)라고 부를지니라.”

 

이 신화가 의미하는 바는 생명이 붙어 있는 동안 인간의 존재 방식은 염려라는 것이죠.

 

 

다른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도 이와 유사합니다. 실존주의는 걱정과 염려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실존주의는 인간의 본성을 염려라고 생각합니다. 불안과 염려는 인간의 근본적 존재 방식이기 때문에 이것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기본적인 입장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사르트르도 불안을 인간 존재를 위한 필수적인 매개라고 주장했으며, 나는 나의 존재를 성립시키는 근원적이고 유일한 계획에 직면하여, 오직 홀로 불안 속에 떠오른다.고 고백하듯 단언하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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