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

내가 네 안에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_헤르만 헤세 "데미안" (1919)

설왕은 2020. 1. 28. 12:35

데미안.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읽어봤을 책입니다. 필독서죠. 저도 고등학교 때 데미안을 읽었습니다. 새가 알을 깨고 막 날아오르려고 하는 그림이 기억이 나고요. 누구든 태어나서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자신이 갇혀 있는 세계를 깨고 나와야 한다는 글귀가 생각이 납니다. 그게 전부라고 할 정도로 데미안은 눈에 들어오고 머리에 들어오는 문장이 별로 없었습니다. 어려워서 뭔 소리인가 싶은 내용이 많았습니다.

 

 

나이 들어서 데미안을 다시 들여다보니 역시나 어렵네요. 이런 글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 책은 소설의 재미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상징이나 비유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면 좋을 텐데요. 간접적으로 말이죠. 여기에 나온 데미안이나 싱클레어의 친구들은 직접 싱클레어에게 가르침을 줍니다. 이런 직접적인 가르침이 어렵습니다. 싱클레어가 고민한 부분들, 사실은 작가 헤르만 헤세가 고민한 것들에 대한 해답을 타인의 입을 통해서 주고 있는데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소설의 탈을 쓴 철학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니체, 헤겔, 후설, 하이데거의 철학을 모두 섭렵하고 있는 대화가 계속 이어지니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전체적으로 데미안은 난해한 소설입니다. 하지만 아브락사스라는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상징적인 그림과 문장 덕분에 이 소설이 주는 주제는 명료합니다. 이 소설의 주제는 자기 자신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볼 때 데미안에서 제시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통해서입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든 아니면 같이 어떤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죠. 예를 들어 싱클레어가 크로머를 통해서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악을 발견합니다. 크로머가 없었다면 싱클레어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아마 훨씬 나중에 발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싱클레어는 데미안, 피스토리우스, 에바 부인과 같이 여러 사람과 대화하고 같이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새로운 모습들을 알아나갑니다. 내가 나 자신을 그냥 들여다본다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타인과 관계를 통해서 마치 거울을 통해 자기를 보듯이 자신의 모습을 알아갈 수 있겠죠.

 

 

자기 자신을 알아내고 자기 자신으로 태어나기 위한 다른 하나의 방법은 자기만의 생각입니다. 헤세는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살인자 카인과 예수 옆에서 회개하기를 거부했던 한 죄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합니다.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해석입니다. 데미안은 카인도, 회개하기 거부했던 죄인도 사실은 그들의 개성을 뚜렷하게 발휘했던 인물로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해 버립니다. 성경적 가치관, 혹은 전통적인 선악의 개념에 익숙한 사람들이 볼 때 매우 불온한 사상입니다. 이 해석의 옳고 그름은 문제로 삼을 것이 아닙니다. 헤세의 주장은 우리가 모두 나쁘다고 판단을 내리는 문제가 정말 그런 것인지 각자 생각해 볼 문제라는 것이지요.

 

저는 두 가지 방법에 대해서 다 동의합니다.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나 자신을 찾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책들은 요즈음에도 많은 사람에게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타인과 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이 없는 나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남이 없으면 나도 없습니다. 세상에 타인이 전혀 존재하지 않고 나만 존재한다면 내가 누구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부지런히 타인과 상호 소통을 해야 내가 누구인지도 더 알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또한 세상의 고정관념에 반항해 보고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의 시선으로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고 그것을 나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일입니다.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가지의 관점이 존재하는 것이 맞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보는 방향이 다를 테니까요. 누구도 나의 관점을 완벽하게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헤르만 헤세가 쓴 책은 나치가 출판을 막을 정도로 불온서적 취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이 힘을 모아서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헤세는 그것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데미안과 같은 소설을 통해서 모두가 옳다고, 즉 독일인이라면 옳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주장을 펼쳤으니까요. 통치 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헤세의 책은 위험하고 불편한 책이었겠죠.

 

아브락사스, 이집트의 신 중에 하나이며 동시에 악마들 중 하나

 

데미안은 좋은 소설이지만 저는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첫째, 너무 어렵습니다. 헤르만 헤세가 더 쉽게 쓸 수도 있었을 텐데요. 소설 치고는 너무 거칠고 불친절한 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데미안의 판매 통계를 보면 10대와 20대가 주로 보는 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재밌어서 읽기보다는 노벨상 수상 작가의 대표작이고 필독서니까 보는 것이겠죠. 그러나 이 책을 읽고 여기에 담긴 사상적 기반을 이해하고 작가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은 너무 힘든 일입니다. 소설을 읽고 머리가 아플 수 있습니다. 그냥 머리 아프게 책을 읽을 요량이면 그냥 니체나 하이데거의 책을 읽으시면 나을 듯 합니다. 니체가 쓴 책이 더 쉬울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머리가 아프지 않으셨다면 책을 제대로 안 읽은 것이니 책을 읽은 의미가 별로 없습니다.

 

둘째, 우리의 상황과 맞지 않습니다. 이 책은 1919년에 출간된 책입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실의에 빠져 있던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독일 사람들이 철학이나 철학이 담겨 있는 글을 매우 즐기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전쟁을 겪고 난 후의 상황도 아니고요. 독일 철학이 익숙하지도 않습니다. 데미안은 독일 사람이라면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필독서로 읽을 만한 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주제 의식이나 주장 자체는 훌륭하지만 이 책을 읽어내는 것 자체가 고통일 수 있고요. 지금 우리의 상황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좀 더 우리와 맞는 책을 읽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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